안녕하세요, 미스테리함 채널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바보 온달은 백인 왕족이었던"이라는 주제로 영상을 준비하였으니 재미있게 시청하시길 바라며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동화 속 바보 온달을 제목 그대로 바보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사랑해서 지극 정성으로 돌봐 주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위인전을 읽으며 자라왔기에 지금까지 바보 온달은 그저 바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밝혀진 사실은 실로 놀라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바보 온달은 그저 생각이 짧은 바보가 아닌, 한국어가 서툴렀던 외국인, 그것도 백인이었다는 설이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요? 오늘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미스터리 속 바보 온달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바보 온달은 백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릴 적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라는 위인전을 읽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신 적이 없으셨는지요? 그렇다면 온달은 정말 바보처럼 어리석어 보였을까요? 만약 그가 정말 어리석어 보였다면 아무리 평강 공주가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고 하여도 결코 장군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요즘처럼 의학이 발전하고 다양한 기능의 의료 기구나 처방전을 통해서도 바보들이 천재가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금 나아지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기능이 떨어지는 누군가가 나라의 장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대다수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는 정말 우리가 알고 있던 바보가 아니라 외국에서 넘어와 정착했던 백인이며, 그래서 국어가 서툴렀던 타국인이었을까요? 정확히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살던 서인 페르시아와 투르크 사이의 혼혈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당시 당나라는 활발한 실크로드 무역으로 상당수 서인들이 거주했는데, 출신지에 따라서 성씨를 지었다고 합니다. 강씨는 사마르칸트, 안씨는 부하라, 석씨는 타슈켄트 이런 식이었다고 합니다. 가장 유명한 게 산씨죠. 씨도 당시 서인들의 성씨라고 하더군요. 고구려 왕이 사마르 이민족 출신인 온달을 사위로 삼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온달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온달 장군을 단지 신화 또는 전설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실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을지문덕 장군과 동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계속 부르는 걸까요? 그것은 그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대에 좋은 교훈을 남기고자 바보를 강조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어져 오다 보니 지금까지도 바보 온달로 이야기가 전달된 탓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온달 장군 이야기를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 고구려 평양성 요새의 온달이라는 바보 같은 사람이 살았습니다. 평원왕에게는 평강 공주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눈물이 많았던 울보였습니다. 그녀에게 계속 울면 온달에게 시집 보낼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시며 그녀를 달래기 위해 겁을 주며 눈물을 멈추게 했다고 합니다. 왕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유명한 바보 온달,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그저 평범하거나 바보가 맞다면 어찌 왕이 온달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평강 공주 또한 온달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눈물을 쳤을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시대에 바보가 어디 한둘이었을까요? 유독 온달의 이름을 왕과 공주가 알 정도였다면, 분명 온달은 흔하디흔한 일반 백성이 절대 아니었다는 추론이 성립됩니다. 다시 말해 온달은 그저 평범하거나 멍청한 바보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평강 공주와 결혼까지 한 것을 보면 그의 신분도 어느 정도 위치해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공주를 출신이 낮은 아무나에게 시집 보내지는 않으니까요.
어쨌거나 평강 공주는 결혼 가능한 나이에 이르게 되었는데, "나는 온달과 결혼하고 싶어"라는 평강 공주의 말에 아버지인 왕은 정신을 잃었을 것이고, "야, 난 그냥 농담이었어"라고 말했겠지요. 그렇게 당황하며 말하는 왕에게 공주는 "한 나라의 왕이 어떻게 거짓말을 밥 먹듯 할 수 있지?"라고 말하며 궁전을 떠나 온달의 집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달 장군은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평강 공주가 착한 아내가 되어줌으로써 온달은 고구려의 장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바보 온달은 불행히도 나중에 전투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던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온달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정말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이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첫째, 그는 장군으로서 대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는 매우 높은 지위입니다. 만약 그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면 장군이 될 수 있었을까요?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바보는 잘 돌봤다고 해서 천재가 될 수는 없듯이 그는 처음부터 바보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평강 공주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사회화가 철저한 사회에서 가족이었고, 가난한 출신의 멍청하고 바보인 온달이 왕의 사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온달은 타국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가설 중 하나가 온달이 서역에서 건너온 백인이었다는 가설과 함께 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의 온달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발의 얼굴과 순수한 마음을 가졌다"며 "온달 어리석은"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발의 얼굴"은 창백하거나 허연 얼굴, 즉 건강하지 못한 얼굴을 표현할 때 쓰는 말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장군 지위를 획득한 온달이 약할 수 있었을까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발의 얼굴"이 공정한 피부의 백인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만일 온달이 백인이었다면 그의 나라는 어디일까요? 우즈베키스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정말 멀리 있는 나라인데요, 삼국 시대에는 우즈베키스탄이 예전의 페르시아, 심지어 비잔티움 제국과 국제 교류를 했습니다. 그 당시 무역 시간은 낙타의 걸음 시간으로 계산됩니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에서 낙타의 걸음으로 계산하면 여덟 달 후에 한반도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이리저리 돌아가고 잠시 쉬는 시간까지 치면 1년이 걸려서 도착할 수 있는 먼 거리였는데, 그 당시 국제 교류가 활발했다는 증거로 삼국 시대 유물 속에 서구인들이 사용했던 많은 유물들이 출토된 까닭이기도 합니다.
옛 자료를 찾아보게 되면 놀랍게도 사마르칸드의 왕실 성씨가 온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투르크족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551년, 르크 족인 공룡으로 불렸던 대전쟁에서 고구려에 의해 약 천명의 포로가 끌려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포로로 끌려온 투르크인의 자손이 결혼 후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온달과 동등한 나이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온달은 다문화 가정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다문화 아이들이 그렇듯이 온달 역시 고구려에서 사용된 언어가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온달의 말투는 부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인들은 그를 바보처럼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결국 커뮤니케이션을 잘하지 못했고, 다른 시민들과는 다르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그가 말도 제대로 못 한다고 말하기 시작하게 되고, 그가 흰 얼굴의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식된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가능성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혼혈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고구려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조선 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장영실을 아시나요? 장영실은 다문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장영실의 기록에는 어머니는 동네 기생 출신으로 부상과 광의의 기생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출신 중국인이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국인의 아들이 어떻게 장군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를 통치하던 왕은 25대 왕 평원왕이었습니다. 왕은 정말 허수아비였습니다. 귀족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서로 싸우며 힘을 다투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평원왕은 궁중의 권력을 강화할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군대를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무예 대회가 있었는데, 매년 3월 3일에는 무예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거기서 승리하면 지위나 출신의 관계 없이 군대에 스카우트될 수 있었습니다. 온달은 거기서 1등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즉시 스카우트되었습니다. 이것이 온달 이야기의 공식 역사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더 큰 논란이 있습니다. 영양왕 주인년 590년,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의 땅을 수복하기 위해 출전하였으나 아단 성에서 신라 군사들이 쏜 화살이 온달을 맞추어 아단 성에서 전사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 고구려와 신라, 백제 사람들은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많이 싸웠습니다. 한강 유역은 백제의 수도였습니다. 장수왕은 결국 이 도시를 고구려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장수왕의 죽음 후 고구려가 100년간 혼란스러웠다는 것입니다. 귀족들이 서로 싸우고 그 사이에 신라가 와서 이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정리한 왕은 평원왕이었습니다. 평원왕 이후의 왕은 영양왕이었고, 온달은 그때 발언했습니다. "우리 땅을 되찾자, 옛 고구려의 땅을 되찾자." 그러자 고구려의 왕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조아, 가서 그들을 파괴하라." 그렇게 하여 온달은 전쟁 중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온달이 싸우러 가기 전에 유언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주경과 초령 폭서 쪽에 있는 우리 땅을 되찾을 때까지."라고 유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주경과 초령 북서쪽은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이 있었고, 그 동네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그 동네에 가면 지금도 온달 산성이라는 산성이 있습니다. 그가 거기로 내려가서 산성에서 전투를 벌인 후 사망했다고 합니다.
온달은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바보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고구려 세 명의 대장군에 대해 이야기할 때 포통, 을지문덕, 연계소문 그리고 온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연계소문과 같은 문장에 들어갈 만큼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서역 출신의 백인이었다면, 만약 그가 정말로 다문화적인 가정에서 자랐다면 우리는 그가 많은 단점을 극복하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인정받아 고구려의 장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온달 장군의 역사 기록을 찾아내고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바보 온달은 정말 바보였는데 평강 공주의 내조로 장군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백인 혈통의 유전자로 우수한 장수로서 자질이 갖추어진 높은 귀족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영상을 어떻게 보셨나요? 재미있게 시청하셨다면 다음 영상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지금까지 미스테리함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동영상으로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3UB-7K8QB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