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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7대 불가사의 [8만 대장경의 신비]

by 미스테리함 2024.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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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미스테리함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의 영상은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8만 대장경에 대한 주제로 준비하였으니, 재밌고 유익한 시간 되시길 바라며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8만 대장경 이미지

 



역사 책에서나 보던 8만 대장경이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합니다. 2007년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국보로 현재 인사 장경판전에 보관하고 있는 고려의 제조 대장경을 지칭합니다. 경판의 수가 8,125장에 달한다고 하여 8만 대장경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고려의 초조 대장경을 다시 새긴 것이므로 제조 대장경이라고 합니다. 흔히 고려 대장경이라고 부르는 목판 인쇄물입니다.

팔만 대장경이 왜 7대 불가사의인지 차후에 소개하기로 하고, 우리나라의 자랑이자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팔만 대장경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팔만 대장경은 고려시기 동아시아의 활발한 불교 교류와 고려 불교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에도 여러 문화권의 대장경과 함께 불교학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목판 인쇄술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판수가 8만 여장에 달하고, 8만 4천 번에 대치하는 8만 4천 법문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 대장경이라고 부릅니다.

고려 시대 두 번째로 판각한 대장경이 제조 대장경입니다. 고려에서 처음으로 판각한 대장경은 11세기 초 현종 대왕 때의 대장경이며, 11세기 말 의천의 주도로 판각된 속장경이 있습니다. 현종 때의 대장경 경판은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이에 당시 집권자인 최우 등의 발휘로 다시 판각한 것이 팔만 대장경입니다. 대장경판을 새긴 것은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려는 강화도의 대장 도감을 설치하고, 남해를 비롯한 여러 곳의 실제 판각을 담당하는 분사 대장 도감을 설치하여 1230년부터 1248년 경까지 약 10여 년 동안 경판을 새겼다고 합니다. 대장경에 수록된 경전들은 초조 대장경을 저본으로 하면서 손과 거번 대장경을 비교하여 교정하였으며, 새로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다양하게 보완하였습니다.

조선 초에 이르러 일본에서는 8만 대장경의 인쇄본뿐만 아니라 경판까지 보내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경판을 주지 않고 인쇄본을 통해 그 요청을 전해주었으며, 때로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과 교환하는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고려나 조선 시기에 인쇄된 본들 중에는 현재 일본에 소장된 경우가 많습니다. 대장경판은 판각 후 강화도에 보관되었다가 조선 초의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해인사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대장경판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2007년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대장경이라는 단어는 석가모니가 일생 동안 설법한 경전과 율, 그리고 그 내용들에 대해 사람들이 전한 논서, 즉 원서들을 집대성한 불교 경전에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대장경판은 종이의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으로, 말하자면 국립 도서관 불교 섹션을 인쇄판과 종이 인쇄본 통째로 넣어 놓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8만 대장경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국가에서 경전 정리 사업으로 진행해 국가별로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데, 한반도의 판본은 고려 시대에 시작하여 조선을 거쳐 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인쇄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해인사의 수다라장 다락방과 강원도 평창군의 5대산 월정사, 부산의 동화대학교 해인사 대장경판을 인경하여 만들어진 대장경 판본 책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조선 정기 일본의 요청으로 보내준 판본도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편집까지 대장경 판과 인쇄본이 모두 남아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8만 대장경 중 가장 오래된 것이 고려의 8만 대장경입니다. 8만 대장경의 경판 숫자는 191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처음 8,258장으로 집계되었습니다. 그 뒤로 대한민국 정부가 1962년 국보 지정 당시 별도의 확인 작업 없이 이 숫자를 그대로 적용하면서 그동안 정확한 수량과 훼손 여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에서는 2000년부터 실시한 해인사 고려 대장경 디지털 영상화 및 기초 자료 데이터베이스 사업과 2014년에 수입한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 관리 계획에 따른 조사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경판의 숫자가 8,135장임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과 1937년에 제작된 추가 경판 36개가 포함된 수치입니다. 목적이 불교 경전 아카이브인 만큼 후대에 집필된 경전이 추가되면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일본판 다이쇼 신수 대장경에도 후대에 추가된 경들이 존재합니다. 후대에 추가된 경들의 문화재적 가치를 두고는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만큼 학문적 사회적 합의가 절실합니다.

팔만 대장경의 인쇄본은 북한의 묘양산에 있는 보현사에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장경 판각이 있습니다. 팔만 대장경은 제작 이후 사라질 뻔한 위기를 세 차례 겪었습니다. 첫 번째는 조선의 태종과 세종 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일본의 다른 다이묘들은 본인들이 불교 신자이기도 했고, 동시에 일본 사회의 주요 권력 축이기도 했던 불교와의 관계를 위해서도 고려가 보유한 불교 경전 컬렉션인 8만 대장경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동시에 일본의 승려들도 손과 의 대장경을 계승한 것으로 고려 대장경이 불경으로서의 정밀도가 굉장히 높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희한하게도 10세기에 처음 목판본이 등장했던 송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700년 동안 대장경의 목판을 제작하지 못했습니다. 8만 대장경의 경판을 얻지 못한 절에서는 책으로 경판을 구해서 일일이 필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태조 때 원료 증으로 마치 막부의 규슈 단다이 있던 이마가와 사다요, 갈레이트 아마 요시나리, 심지어 무로마치 쇼군 원도이나 도전 원이 이정 원고도 고려 대장경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 인쇄본을 요구한 기록이 조선왕조 실록에 보입니다. 주로 외구 진남 및 고려 조선 측인지 송환에 대한 대가로 대장경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고, 태종 때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선물로 받은 코끼리를 가지고 와서 바치며 팔만 대장경 경판의 인쇄본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오느 날의 주국 후 지방인 슈고 다이묘인 오치 씨의 경우 스스로 백제 임성 태자의 후손인 도레인 가문으로서 친조 정책을 취했고, 조선 정부에서도 시를 백제의 후손으로 인정해서 조선 초기에는 상당히 교류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조선의 외구 진압의 공정 및 예탄 반도 국가인 백제와의 연고를 들어 조선이 꾸준히 팔만 대장경 경판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불교가 여전히 중요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승부리 기조였다. 을 청구하였고, 심지어 쇼군이 나서서 8만 대장경을 받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세종 5년 무로마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승려 규주 법령의 경우 조선에 와서 세종에게 팔만 대장경 경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때 세종께서 "저들이 자꾸 와서 팔만 대장경을 달라고 하는데 그냥 줘 버릴까?"라고 신하들과 논의하였습니다. 대신들은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임금께서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 나라에서 청구한다 하여 처음에는 주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경판은 비로소 같은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을 줬다가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만약에 염려하는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임금께서 일본의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8만 대장경은 16년의 제작 기간 중에 판각 기간만 약 12년 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판각이란 나무 조각의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8만 대장경에 쓰인 나무로는 주로 소나무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소나무가 쓰인 이후로는 그 시대 주위에 가장 흔한 나무 종이며 재질이 균일하다는 이유로 소나무가 쓰였다고 전해집니다. 연도에 따라 판각을 달랐지만 12년 동안에 8,134판, 글자는 5,200만 자 가량을 각하했는데, 과연 그 많은 판각을 어떻게 하였는지 의문입니다. 아주 숙달된 각수로 하여금 옛날 방식으로 대장경판을 시켜 보았더니 하루에 20여 자를 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 판각에 참여한 각수를 추정해 보면 약 3명이 됩니다. 그것도 완전 숙달된 고수나 달인들 말입니다. 그러니까 3명의 각수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12년 동안 판각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불가사의인 이유입니다. 594명의 아주 능숙한 각수가 존재했었지만 600여 명이 존재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그 시절 최고의 직업이 혹시 각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많은 달인들을 모아서 작업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매년 고르게 판각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해에는 약 1,000명 이상의 각수가 참여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불가사의한 점은 팔만 대장경은 강화도에서 제작되어 그곳에 선사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어째서 현재 해인사로 오게 되었는지도 불가사의입니다. 거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서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강화도가 아닌 남해나 거제도 등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대장경판이 원래 두 벌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주장은 한 벌은 남해나 거제도에서 나무를 가져와 해인사에서 새겼고, 또 하나는 서해안에서 나무를 실어다가 강화도에서 새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판각 위치나 옮겨온 경로에 대한 문헌의 기록과도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벌을 새기는 것도 많은 국력이 동원되었는데 두 벌이나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도 팔만 대장경은 한국의 불가사의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국보 팔만 대장경을 잘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우리들의 과제라 생각합니다. 최근 팔만 대장경의 보존 상태와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2023년 문화재청은 8만 대장경의 보존 상태를 점검하고 디지털화 작업을 통해 경판의 손상 여부를 확인하는 프로젝트를 완료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8만 대장경의 경판을 3D 스캔하여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경판의 손상 부위를 정확히 파악하고 향후 보존 및 보건 작업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예정입니다.

또한 최근에는 팔만 대장경의 제작 과정과 관련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팔만 대장경의 판각 작업이 단순히 종교적 목적뿐만 아니라 고려의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팔만 대장경이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상징물로서 제작되었으며, 이를 통해 고려의 단결과 저항 의지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연구와 학설들은 팔만 대장경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다양한 연구가 지속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오늘의 영상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좀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또 다른 영상을 준비하기 위한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리며, 지금까지 미스테리함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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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보러 가기 > https://www.youtube.com/watch?v=jRfTDiBby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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