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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퍼진 3대 예언서가 있다. 송하비결과 격암유록 그리고 정감록 이 세계의 예언서가 가장 유명하다. 정감록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과 조선의 멸망 후 일어설 정씨의 조상이라는 정감이 금강산 또는 가야산에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그래서 책 이름이 정감록이다. 정감록의 저자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조선 왕조 건국 직후 불안한 민심을 배경으로 이 책이 집필되었다고 한다. 정시성을 가진 구세주인 정도령이 조선 왕조를 세우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왕이 된다는 정감록의 기본 줄거리인 정감록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18세기 영조, 정조 무렵에 나왔다고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 기록들 중에서 정감록이 최초로 언급된 예는 1739년 조선 영조 때 6월 9일자 승정원 일기인데, 여기서 영조 임금은 정감록은 도적들이 믿는 책이니 매우 교화하고 사악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감록이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도 정감록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예언들은 계속해서 전해졌다고 추측한다. 정감록에는 조선이 망한다는 구절이 있으므로 조선 왕조에 반대하는 의도를 내포했다. 이런 내용 탓에 조선 시대에는 금기시 되었지만 민간에는 널리 퍼졌다. 정감록은 일제강점기까지 많은 신흥 종교의 경전으로 활용되었다. 무엇보다 정감록은 필사가 반복되면서 판본이 다양하게 형성되었지만 핵심 요지는 조선 왕조가 망하고 계룡산에 정시가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씨를 두고 도령이라고 말한다.
정감록 모반 사건의 판본에는 이씨가 망하고 김씨, 유씨, 정씨의 삼국으로 아니었다가 최종적으로 정시가 통일한다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 왕조가 망하고 정도령이 새 왕조를 세우기 전까지 환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피할 지역인 10승지로 피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고도 한다. 10승지는 현재 기준으로 기록하였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금계리,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말 그대로 속리산 산속,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현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금곡동,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 강원도 정선군에서 영월군 향하는 조양강,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남산제일봉.
그런데 몇 가지 묘한 점이 있다. 10승지로 지목된 곳들이 대체로 남부 지방이고, 때가 되면 그리로 옮겨가야 한다고 서술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뤄볼 때 정감록의 성지는 남부 지방에서 먼 북쪽, 특히 서북 평안도 지역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기인 홍경래 난이 농민 봉기에서 정감록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첫 사례이다. 이후 홍경래의 이름과 더불어 정감록은 19세기 농민 봉기의 바이블처럼 사용되었다.
해당 지역들은 큰 고은 전무하고 상당수는 산속 협곡 바위 그늘 등 일반적 거주지로서 부적합하지만 대신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렵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다. 즉 무릉도원이라는 생존주의 언급하는 베이스 캠프에 가깝다. 이를 위와 조합하면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했거나 세금 문제 등으로 야반 도주한 사람들이 실제 역사의 빨치산처럼 숨어들기 최적의 지세가 바로 저 10승지다. 그리고 정감록에서 항상 언급되는 궁궁을을이란 주문이 있는데, 이것의 해석으로 반란도 일어나고 일제강점기에 많은 신흥 종교들이 제각각 계속해서 교리로 삼았다고 한다.
그 외 동학 운동을 일으킨 동학 접주 손화중이 선운사 마애좌불상 배꼽 아래에서 꺼냈다는 비결록이 정감록이었다는 카더라 이야기가 있다. 마애좌불상은 보물 지정되었으며 크기 15.6m 절벽에 새겨졌다. 명치 북은 배꼽에 봉인되는 적이 있는데, 이 안에 절의 창건자인 검단 선사가 비결을 써 넣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말 전라감사 이서구가 이 비결을 꺼내기 위해 봉인을 풀었다가 하늘에서 갑작스레 천둥이 내렸고, 이서구가 책의 첫장을 열어보니 첫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연다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서구는 두려워하며 다시 봉인하였다. 19세기말 손화중이 이 비결을 가져갔다고 한다.
현대 한국에도 정감록은 신흥 종교를 중심으로 아직까지도 영향력이 있다. 성이 정씨인 유력 대권 주자가 나올 때마다 정도령 드립을 많이 쳤는데, 특히 현대 그룹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 창당과 1992년 대선 출마, 2002년 16대 대선 당시 정몽준 돌풍, 2010년대 들어서는 충청도 출신의 정운찬 당시 총리가 잘 맞아떨어져서 자주 나왔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아예 정씨 유력 정치인들을 패러디할 때도 종종 쓰이는 모양이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의원은 본인이 2007년 유력 개권 주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본인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해서 지지자들로부터 정도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지금은 오히려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이 조롱의 의미로 그렇게 부른다. 오히려 제 17대 대통령 선거에는 이씨인 이명박이 당선됐다. 2022년 20대 대통령까지 나온 현재까지 역대 대통령 중 정신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외 대통령 권한 대행이나 영부인, 북한 역대 국가원수 등 유사사례를 다 뒤져봐도 정씨는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정씨보다 드문 성씨인 전씨, 노씨 문씨에서도 대통령이 나왔음을 감안하면 예언이 들어맞기는커녕 계속 빗나간 것이다. 다만 정씨가 흔한 성인만큼 언젠가는 나오긴 하겠지만 이 정도면 비가 올때 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격이니 예언이 맞았다고 보기는 무리다. 정감록이란 제목으로 여러 버전의 책이 있지만 내용이 전부 다르다. 사실 원본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가 최초에 정감록을 썼겠지만 이런 금서는 유통 금지이기에 정감록이라는 미래를 다루는 금서가 있더라는 말만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책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런 오리지널 정감록의 명성이 높아지자 여러 사람이 정감록이라는 명성에 기대고자 익명으로 다른 내용이 담긴 정감록을 집필하여 퍼트렸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정감록의 내용과 판본은 계속 증가했다. 따라서 독자가 대충 시대 상황에 맞춰서 내용을 해독한다.
조선이 멸망했기 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다 건너 섬나라의 진인이 백성을 구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의 핵폭탄을 투하해서 광복을 맞이하게 했고, 이후 트루먼 독트린을 주창하여 6.25 전쟁에 미군을 파병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당시 상당수의 국민들이 트루먼을 진인이라고 여겼다. 기묘하게도 정감록에 나오는 정씨 왕조의 도읍지로 꼽히는 계룡산이 한때 박정희 유신 정권 때인 대한민국 제4공화국이 행정 수도 이전을 구상했던 공주시나 정부 대전 청사가 있는 대전광역시와 굉장히 가깝다. 심지어 계룡대는 계룡산 아래 있다. 세종시 이전 당시에는 계룡산 아래 신도시 최종 내개 후보지 안에 들었으나 세종시는 연기군 남면 지역에 들어섰다.
신도안이 탈락한 가장 큰 이유는 조선 시대라면 몰라도 현대 도시가 들어서기에는 입지가 좁고 교통도 불편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정감록에 임진왜란 관련된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이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전쟁이었고 조선 사회에 매우 많은 피해와 영향을 주었음을 감안한다면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일부 연구가들은 정감록이 사실은 임진왜란 이전에 작성된 문헌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정감록은 다소 허황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존재 의미는 인정을 받고 있다. 세도 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새 세상 개척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감록은 진정한 대한민국의 3대 예언서라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