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스테리함 채널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의 영상은 고대 로마 쿠마의 시빌라의 전설과 예언이라는 주제로 영상을 준비하였으니, 재밌고 유익한 시간 되시길 바라며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바이아는 로마 제국의 '라스베이거스'로 불리던 곳으로, 이탈리아 칼데라가 우진 서안의 나폴리에서 약 30km 떨어진 휴양지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변덕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곳이었죠. 위대한 웅변가 키케로는 망가에서 퇴각하는 연설을 작곡했고, 시인 버질과 박물학자 플리니는 공중목욕탕이 닿는 곳에 거주지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부자와 권력자들이 그들의 법적인 일을 수행하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파티를 위해 주말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은 수중 도시가 되어 버린, 그 당시 최고의 유명 인사들의 아트이며 화려함의 대명사였던 바이아입니다. 강력한 정치가들이 해변가에서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온천 스파와 모자이크 타일 수영장이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의 바이아는 단순한 휴양지뿐만 아니라 신화와 전설이 깃든 신비로운 장소였습니다. 이곳은 고대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심해 속 지하 세계로의 입구가 있다는 전설로 잘 알려져 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바이아에 깃들어 있는 전설 중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바이아는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 미래를 예언하는 여성 '시빌라'와 관련된 전설로 유명합니다. 시빌라는 바이아 근처에 위치한 지하의 입구를 지키며, 죽은 자들의 영혼이 지나가는 곳에서 미래를 예언했다고 전해집니다. 시빌라의 예언은 단순한 미래 예측을 넘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 신성한 지침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쿠마의 시빌라는 그녀의 예언을 통해 로마의 운명을 예고했으며, 이는 로마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쿠마의 시빌라는 로마 왕국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키우스의 시절에 전해집니다. 이 예언서는 로마의 미래를 세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로마인들은 이 예언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그녀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쿠마의 시빌라는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했다고 여겨졌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시빌라는 아폴로로부터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영원히 젊을 수 있는 능력은 받지 못해 수세기 동안 늙어 갔다고 합니다. 쿠마의 시빌라는 로마 왕국의 마지막 왕인 루키우스 타르키우스에게 아홉 권의 예언서를 받치며 막대한 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타르키우스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형편없는 책을 팔려고 한다며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시빌라는 세 권을 불태우고 나머지 여섯 권을 같은 가격에 사라고 요구했습니다. 타르키우스가 이번에도 거부하자 시빌라는 또다시 세 권을 불태운 뒤 마지막 세 권을 같은 가격에 사라고 권했습니다. 타르키우스는 그제야 그 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세 권을 원래 가격에 사기로 했습니다. 그는 이 책들을 로마로 가져가서 유피테르 신전 아래에 있는 지하실 석관에 보관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책을 열람했다고 합니다.
타르키우스 이후 공화정이 들어선 후에도 시빌라의 예언서는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귀족 두 명이 예언서 관리를 맡았고, 기원전 367년에는 귀족과 평민 각 다섯 명씩으로 구성된 군의 벼슬아치들이 예언서를 관리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전직 집정관과 전직 무관이었으며, 다른 모든 공직에서 면제되었습니다. 또한 예언서는 철저히 안전하게 보관되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평생 비밀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은 원로원의 명령이 내려지면 유피테르 신전 지하실 석관에 보관된 예언서를 살펴보고 특정 문구를 찾아내어 원로원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전염병이 발생하거나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전쟁에서 패하는 등 국난에 처할 때마다 예언서를 살펴보고, 그 사건에 가장 적합한 예언을 찾아 이를 해결하는 정책에 반영했습니다. 고대 기록에는 로마 정부가 예언서에 따라 정책을 집행한 수많은 사례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390년 알리아 전투 패전으로 로마가 침략을 당한 뒤, 독재관 마르쿠스 퓨리우스 카밀루스는 신전을 재건하고 정화를 실시하는 절차를 어떻게 수행할지 알아보기 위해 시빌라의 예언서를 참고했습니다. 기원전 218년 겨울,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이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자 로마인들은 시빌라의 예언서에 따라 대규모 희생제를 치렀습니다. 그럼에도 한니발이 연이은 승리를 거두자,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7만에 달하는 로마군을 괴멸시키자 원로원은 예언서에서 인간을 희생제물로 삼으라는 예언을 발견하고 그리스인 두 명과 갈리아인 남녀 두 명, 총 네 명을 포로로 생매장했습니다.
기원전 205년에는 예언서에서 "신들의 어머니를 로마로 데려온다면 낯선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추방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원로원은 키벨레 상석을 프리기아에서 모셔오기로 했고, 기원전 204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 주관하에 상석을 로마로 옮겨 승리의 신전에 놓여 특별 경기가 개최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재난이 닥치거나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고대 시빌라 예언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라인 내전이 진행되던 기원전 83년 로마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원로원은 사모스, 시칠리아, 에트루리아, 아프리카 등 각지 사원들의 사절들을 보내 시빌라가 남겼다는 예언서들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후 각지에서 모인 예언들의 진위 여부를 판별한 뒤 기원전 76년 푸블리우스 비니우스, 마르쿠스 오타, 루키우스 발리우스 등이 약 천 권에 달하는 예언서를 편집했고, 퀸투스 크리누스의 승인을 받아 새 예언서로 확정한 뒤 재건된 유피테르 신전 지하실 석관에 보관하였습니다.
기원전 57년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추방된 이집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원로원에 자신을 파라오 지위에 복귀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원로원은 관리자들로부터 예언서의 내용을 전달받은 뒤 이집트의 군대를 보내지 말고 외교로 해결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빈이 프톨레마이오스 세로부터 뇌물을 받고, 기원전 55년 이집트로 쳐들어가 알렉산드리아를 접수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귀시켰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54년 티베르 강이 범람하면서 로마가 피해를 입자 로마인들은 이를 신이 내린 천벌이라 여기고 가비니우스를 신성모독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가비니우스는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지원 덕분에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44년 초 로마 전역에 "오직 왕만이 파르티아인을 물리칠 수 있다"는 예언이 시빌라 서에서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이에 많은 이들이 파르티아 원정을 행하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의도를 의심했습니다. 예언서 관리자 중 한 사람이었던 루키우스 코타가 카이사르의 원정 시작 직전에 개최될 3월 15일 원로회 때 예언서 내용을 보고할 예정이었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무산되었습니다.
기원전 18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시빌라 예언서의 재편 작업이 이루어졌고, 기원전 11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사망하면서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된 아우구스투스의 지시에 따라 빌라의 예언서를 제외한 모든 예언서가 불태워지고, 시빌라의 예언서는 팔라티노 언덕의 아폴로 신전 아래 금박 상자 두 개에 보관되었습니다.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에도 네로가 예언서를 접한 뒤 여러 신전의 재물을 바치는 등 로마의 역사 내내 시빌라 예언서는 매우 존중받았습니다.
하지만 끝으로, 더 이상 로마 정부에게 존중받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대중 종교, 국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그리스도교 신자이며 시인 루트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마트 하우스는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405년 그리스도교도이 빌라 예언서를 불태우는 신성 모독을 저지르도록 조장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빌라 예언서는 이렇게 소실되었지만, 오랜 세월 로마 정부의 정책에 반영된 만큼 지중해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를 모방한 빌라 신탁이 동부 지중해 세계에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시빌라 신탁의 일부 구절을 인용하였고, 이 세계의 수많은 기독교 작가들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그리스도교 탄압을 중단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낼 때, 신탁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기독교가 로마에 유익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그 시대에도 쿠마의 시빌라의 예언과 이를 인용한 베르길리우스의 전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렇게 바이아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기원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예언했던 쿠마의 시빌라의 전설과 예언이 깃든 곳입니다. 바이아는 지진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지각이 변동하면 육지에 있던 도시가 물에 잠겨 수중 도시가 되기까지, 최고로 화려한 휴양지로 부각되며 많은 도시들이 최고의 스타들을 위한 쾌락의 장소였습니다. 그 당시 세계에서 최고로 화려했던 문명의 꽃을 피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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